파우스트를 읽고
괴테의 파우스트 1를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하는 포스트.
1. 파우스트의 고뇌와 인간의 한계
비극 제1부 밤 中
파우스트: “… 환상이 보통 때는 대담하게 나래를 펴고 희망에 가득 차 영원한 경지까지 날아가다가도, 기대했던 행복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좌초하게 되면, 이젠 조그만 공간에도 만족하게 된다. 곧 마음 속 깊이 걱정이 둥지를 틀게 되고, 거기 남 모르는 고통이 생겨나 불안스레 흔들대며 기쁨과 안식을 방해한다. … 그리하여 우리는 별 것도 아닌 일 때문에 두려워 떨고,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놓고 줄창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신들을 닮지 않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는 벌레와 닮았다. 쓰레기를 먹으며 살아가다가 나그네의 발길에 밟혀 파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진리를 좇아 한 평생을 바친 파우스트 또한 (1)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2) 작은 것에 대한 만족, (3) 곧 이어 찾아오는 걱정들로 인간은 신들을 닮을 수 없음을 느낀다.
(1) 내가 어렸을 때 순수한 마음 혹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꿈꿔온 꿈과 이상에 대해, 커가면서 내가 원하던 걸 모두 이룰 수 없음에 괴리를 느끼고 현실에 타협하게 되었으며, 또한 여러 프로젝트와 창업을 통해, 개인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적다는 점에 더욱 괴리를 느꼈음. (그로 인해 조직에 대해 조직의 존재 이유와 조직이 추구하는 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됨 - 현재는 조직이 정신적인, 육체적인 시너지를 이루어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보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 조직이 존재한다고 믿음. 그러나, 여전히 조직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도 매우 니치하다는 것. 내가 컨트롤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는 세상의 부분과 영향력에 대한 괴리는 여전히 있음.)
(2) 작은 것에 대한 만족과 범사에 대한 감사함은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위의 괴리에 대하여, 작은 목표와 작은 성취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동반됨. 그러면서 그 당시에 이 고민에 대해 결론을 내렸던 것은, “몰입의 즐거움”이었다. 큰 목표와 일을 좇으면서, 내가 큰 목표가 멀리 있어 이룰 수 없음에 괴로워하지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작은 목표와 일을 실천하면서, 그 작은 일에 온전히 몰입을 한다면, 충분히 작은 일에 감사하면서도 즐거운 가득찬 하루를 보낼 수 있겠구나였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또 다시 걱정이 생기고,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발생하지만, 나 역시 인간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방황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자체로도 괜찮겠다.
2. 그레트헨과 하인리히의 결말과 해설
비극 제1부 감옥 中
마르가레테: “… 구걸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게다가 양심의 가책은 어떡하고요! …”
작품 해설 (정서웅 교수님 ) 中
“<천상의 서곡="">과 본문과의 연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주님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의 내기 -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모든 사건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회의에 빠진 인간 파우스트를 유혹할 수 있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장담에 주님은 매우 암시적인 답변으로 응수한다.천상의>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알고 있다.
따라서 주인공 파우스트는, 악마가 신의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선택한 견본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 파우스트는 학문의 힘으로는 우주의 본질을 규명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는 마술의 힘으로 지령을 불러내지만, 그에게서도 명쾌한 답을 얻어낼 수가 없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 사이의 쟁점이 한 인간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매인다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
라는 주님의 확신이 이 희곡의 기본 주제요, 의도된 각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예정된 진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존재가 파우스트인데, 그는 예외적 인간으로 설정된다. 요컨대 그는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아가 신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사람이다.
학문의 힘으로도, 정령의 도움으로도 이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그의 절망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 고귀한 사랑은 악마의 농간으로 엄청난 죄악의 결과를 낳는다. 고전적 아름다움을 획득한 듯하지만, 이것도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통치자의 권력을 얻었지만, 이것 역시 악마의 도움에 의한 것이기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 파우스트의 승리는 타인에 대한 헌신적 사랑에서 기인한다. 버려진 땅을 일구어 만인을 위한 복지 낙원을 만들려고 했을 때, 그의 의지는 악마와의 계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 뜻을 위해 나는 모든 걸 바치겠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굳은 결의만으로 그의 영혼이 구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저지른 죄과에 대한 용서를 빌고 구원을 간구한 것은 사랑의 힘이다. 그것이 신의 은청을 빌려 이 언제나 노력하며 스스로 애쓰는 자
를 악으로부터 구원한 것이다. 초월적 의지와 절망 사이, 삶에 대한 회의와 범신적인 신앙심 사이를 오가며, 신의 창조물은 세계 안에서 빛과 어둠의 양극성을 모두 체험하고, 결국은 선을 지향하는 그의 의지로 보다 높은 영역으로의 상승을 이루어낸 것이다.
천국으로부터 속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는 과정. 끊임 없이 노력하는 인간이 힘든 과오의 길로부터 보다 나은 것을 지향함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
파우스트1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그레트헨을 지켜보는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예외적인 인간인 파우스트도 쾌락 앞에 죄악의 결과를 얻는다. 이는 모든 인간은 인간의 기준에서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우주적/신앙적 관점에서는 범인凡人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나약하고 때로는 그에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실망하지만,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인지하는 문제를 푸는 방법이다: (A)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B)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C)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지 고민한다. 시작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때로는 무례하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호전적인지~= 승부욕이 있는지, 소심한지 ~= 섬세한지, 말이 많은지 ~= 분위기를 잘 띄울 수 있는지), 파악하고, 아 이런 사람이구나, 이겠구나 이해하고자 하면 그게 당연한 일이기에 조금 덜 감정적으로, 더 현명하게, 대처가 가능한 것 같다.
어려서부터 큰 꿈을 꾸라고 배웠고, 나의 성공한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서른 살의 나는 과연 열 살의 내가 꿈꿨던 나인지, 그렇다면 마흔, 쉰 살의 나는 그 모습에 근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다. 내가 꾸었던 꿈은 결코 나 혼자 이루어낼 수 없는 꿈이다.
(A) 나를 포함한 우리는 불완전하다. (B) 나는, 타자는, 차이가 있고, 배울 점이 있으며, 결함이 있다. (C) 불완전함 속에서 개인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너무 부족한 점이 많으니, 우리는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름을 포용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울리는 위치에서 적재적소에 쓰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때로는 방황하겠지만, 노력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 사회가 조직으로 진화/발전하게 된 것은 조직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조직에 들어가고자/만들고자하는 이유는 조직이 개인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